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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룡산-후백제왕 견훤(甄萱)의 전설이 있는 지룡산

불멸의 이신신 2006. 6. 7. 18:53

▶일 자 : 2006. 6. 3(토)▶대상산 : 지룡산( 659  m)▶산행코스 : 매표소~너덜지내~갈림길~전망대~정상~능선~내원암

 

<지룡산 정상에서>

 

능선에서 본 지룡산의 암벽

 

 

갈림길

 

 

내원암

 

▼내원암의 유래

 

<국제신문에서 발췌한 지도>

 

<지룡산>운문사와 청도군청 그리고 청도문화원에서도 속시원한 답이 안들리고, 지식의 보고라는 인터넷에는 아예 이런 의문조차 없다. 국제신문 취재결과를 굳이 종합해보자면 지룡산이란 이름은 견훤 등과 관련된 전설은 있지만 옛 문헌에는 전혀 보이지 않아 근래에 붙여진 것으로 보이고, 절이름 앞의 산이름은 근접한 곳에 위치한 봉우리 이름을 붙인다는 관습에 따라 암봉인 호거대를 호거산으로 간주해 달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원래 대작갑사이던 절을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로 사액한 뒤 운문산이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명명되지 않았나 싶다. 이는 17세기 이중경의 '유운문산록'에서 보듯 이 일대 전체가 운문산으로 불렸음을 방증한다.

 

<지룡산의 전설>후백제왕 견훤(甄萱)이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야설에 의해 이 산이 지룡산이 되었고, 이 산성을 지룡산성(호거산성,운문산성)이라 부르는 지룡산성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三國을 통일하게 된 계기의 터전이기도 하다. 그 높은 산정에 광막한 성축의 흔적이 지금도 생생하며 이 성을 축조한 후백제왕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기 위해 훈련한 후백제군이 쓰다 묻은 백제 동제식기(銅製食器)가 지금도 이따금 출토되고 있다.신라 말엽에 운문면 신원리 내포에 얼굴이 아름답고 몸매가 날씬한 과년한 처녀가 있었는데 원근의 젊은이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이 처녀는 부모님을 모시고 현숙하고 화목하게 살고 있었다. 꽃피는 춘 3월밤에 밝은 달을 쳐다보며 춘정이 도도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장래 배필이 될 헌헌 대장부를 그리다가 밤이 이슥하여 문고리를 잠그고 잠이 들었다.얼마나 지났는지 처녀가 깜짝 놀라 잠을 깨어 보니 머리맡에 사람이 앉아 있지 않은가. 처녀는 너무나 놀라 고함소리도 내지 못하고, 멍하니 총각을 쳐다 보다가 급기야 정신을 가다듬고 말하기를 "누구시온데 이 밤중에 함부로 남의 처녀방에 들어왔어요" 라고 하니, 총각이 대답하기를 "낭자 무례함을 용서 하세요. 나는 여기서 좀 떨어져 있는 곳에 살고 있으나 낭자를 주야로 사모하던 끝에 이러한 무례를 범하게 되었으니 너무 책하지 마세요." 처녀는 총각의 말을 듣고, 풍모를 다시 한번 바라보니 늠름하고 믿음직한 미장부였다. 처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가는 마음이 오래전부터 사귀어온 사이 같은 마음에 빠졌다. 이리하여 젊은 남녀는 달콤하고, 행복한 하루밤을 지내고 훌쩍 떠났는데 처녀는 그후부터 그 총각을 한시라도 잊지 못하고, 총각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그 이튿날부터 자정이 좀 넘으면 언제나 찬바람이 일면서 그 늠름한 총각이 처녀방을 찾아 들어 사랑을 속삭이고, 불 태우다 첫 닭이 울기 전에 훌쩍 떠나 버린다. 이렇게 지나는 것이 한달 가고, 두달 가고, 또 반년이 되었는데 그간 부모들은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곳곳에 좋은 혼처를 구해도 딸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막무가내여서 부모들은 딸이 사모하는 젊은이가 있나 보다 하고 딸을 달래고 야단을 쳐서 추궁하였으나 처녀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여 부모들은 딸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달이 가고 7,8개월이 되니, 처녀는 그간 자신이 잉태한 것을 부모에게 숨기고 배를 천으로 싸매어 지냈으나 하루는 모친이 방에 들어서는 딸을 보니 분명히 잉태한 모습이었다. 모친은 딸을 붙잡고, 치마를 벗겨보니 잉태가 분명하고, 벌써 만삭이었다. 모친은 천지가 꺼지는 것 같았다.딸을 앉히고, 어떻게 된 연유를 물으니, 딸은 울면서 지난 일들을 낱낱이 이야기하였다. 모친은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남의 이목도 두렵거니와 딸의 장래 또한 태산같은 걱정이라, 딸을 방에 가 있게하고, 남편과 의논을 하게 되었다. 부모들은 이렇게 된 이상 하루 빨리 그 총각집에 통혼을 하여 혼례를 치루어야 하겠다고 결정하고 딸을 불렀다. 아버지가 들어와 앉은 딸에게 말하기를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라, 그 총각집에 매파를 보내어 혼사를 정하도록 할터이니 너는 너무 걱정 말고, 그 총각의 거처와 이름을 말하여라" 곁에 있든 어머니도 "애야, 이 마당에 부끄러울 것이 있느냐, 아버님께 말씀드려서 빨리 혼사를 치루도록 해라" 하였다. 처녀는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죄송합니다. 사실은 그 총각의 거처도 이름도 모르옵니다." 하며 그 사이 총각과 주고 받은 사연을 자세히 아뢰었다. 어느날 총각이 말하기를 "앞으로 석달 동안만 기다려 주시면 반드시 모든 것을 밝히고, 아내로 맞이 하겠으니 그 동안만은 절대로 나의 거처를 알려고 하거나 나의 정체를 알려고 하지 마세요. 절대로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니 낭자는 나를 믿어 주세요" 라고 했으니 "이 약속을 지켜야 하니, 석달만 기다려 주세요" 라고 하였다. 부모들은 "이때까지도 있었는데 그 총각이 말한 석달이 이제는 두달도 채 못남았는데 그야 못 기다리겠느냐 너무 걱정말고 몸조심하여라" 하고 딸을 위로하였다.그리하여 며칠이 지난 뒤, 어머니가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 오드니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영감, 이 일을 어떡하면 좋아요. 글쎄 온 마을에서 우리 딸이 어떤 남자와 붙어서 아기를 배었다는 소문이 쫙 퍼졌으니 장차 우리들은 무슨 낯으로 동네 사람들을 대할 수 있으며 딸애의 신세는 어떻게 됩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니 영감 역시 기가 찼다. 딸을 불러 이 이야기를 한 후, "이제는 하루도 지체할 수 없으니 그 총각의 부모를 알아서 혼사를 치루어야 한다" 라고 하니 딸은 "네 알겠습니다" 하였다.그날 밤 처녀는 찾아든 총각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하고, 혼사를 지낼 것을 부탁하니 그 총각 말하기를 "여보 낭자, 이제 날짜가 겨우 한달도 못 남았는데 이때까지도 참고 기다렸는데 조금만 더 참으세요" 하였다. "처녀는 부모님의 성화가 대단합니다."라고 하니, 총각이 "낭자, 미안하오,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서 나를 믿고 기다려주오" 하였다.이튿날, 이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는데 아버지는 며칠 남지 않았으니 그 총각 말대로 기다리자 하는데 어머님은 "안된다, 만약 그 총각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너는 애비없는 자식을 낳게 되고, 아이 성도 모르는 자식을 키우게 되고, 또한 너의 신세가 어떻게 된단 말인가" 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처녀의 마음 또한 착잡하기 이를데 없었다.며칠이 지난 다음, 저녁을 먹은 뒤 어머니가 말하기를 "좋은 방법을 알아 두었는데 오늘 밤에 네가 내말대로 하면 반드시 총각의 거처를 알 수 있으니 잘 하여야 한다." 면서 명주실 꾸리를 하나 딸에게 건내 주며 말하기를 "오늘밤에 그 총각이 오거든 그 발목에 이 명주실을 묶어 두면 반드시 그 거처를 알 수 있으니 꼭 그래야만 한다." 라고 하였다. 딸은 그 명주실 꾸리를 받아들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그날밤, 총각은 여전히 찾아 들었고, 정다운 시간을 보냈는데 처녀는 이 명주실을 발에 묶느냐 안 묶느냐 고민 하였다. 한편으로는 총각이 말한 "이제 겨우 며칠 지나면 된다" 하든 것과 어머님의 "성도 모르는 아이를 낳고, 애비없는 자식을 길러야 하는 너의 신세가 말이 되느냐" 하든 말이 서로 엇갈려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은 명주실을 총각의 발에 묶기로 결심하고, 총각이 새벽에 떠나려고 처녀를 안고 이별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을때 처녀는 그 발목에다 명주실을 묶어 두었다. 처녀는 잠을 자는둥 마는둥 하다가 날이 밝자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부모들은 딸방으로 달려가 보니 명주실이 창문 구멍으로 빠져 나가 있었다. 부모들은 이 명주실을 따라 추적을 했드니 복호산(지룡산 옆)중허리의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부모들이 동굴 속으로 명주실을 따라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동굴 속 막바지에 오색이 찬란한 짚동 같은 지렁이 한 마리가 몸통을 길게 뻗고, 낮잠을 자고 있지 않은가? 부모들은 워낙 큰 이 지렁이을 잡을 도리가 없어 궁리 끝에 노루 가죽을 지렁이 몸둥어리에 덮어씌웠다. 이래서 지렁이는 죽고 말았으며 그날밤부터 그 총각도 나타나지 않았다.그후 달이 차서 처녀가 잉태한 아기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자라서 후백제왕 견훤(後百濟王 甄萱)인데 황간 견씨(黃磵 甄氏)의 시조라고도 한다. 견훤은 애꾸눈 궁예(弓裔)의 부하로서 고려왕이 된 왕건과 친분이 두터웠다. 궁예를 따라 신라를 등진 이들은 태봉국왕(泰封國王) 궁예를 죽인 후 왕건은 고려국을, 견훤은 후백제국을 세웠다. 미륵불의 후신으로 자처한 견훤이 실인심하였고, 신라를 정복하기 위해 선조 지렁이의 영지인 지룡산을 찾아 지룡산성을 구축하여 끝내 신라를 정복하는데까지는 성공을 했지만 끝내 아들 신검(神劍)에게 왕권을 빼앗긴 후 금산사(金山寺) 마루 밑에 묶여 있을때 등창에 걸려 결국 죽고 말았다 한다. 세기의 풍운아 견훤은 과연 지렁이의 아들일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