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자 : 2009. 8.30(일)
◈여행지 : (평창군)오대산 월정사~봉평 메밀꽃축제~(영월)사자산 법흥사
▼오대산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1970년 기울어졌던 팔각구층석탑을 해체 복원
▼월정사 적광전
1964년 중창 당시 대웅전이었으나 1950년 탄허스님이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뜻으로 적광전으로
고쳐 달았음. 이자리는 과거 7불보전이 있었으나 6.25때 소실.1960년 만화스님이 중건.
▼봉평 메밀꽃필무렵 (http://www.hyoseok.com/html/index.asp 효석문화제)
▼효석문학관
▼소설의 물레방아간과 이효석 생가
▼법흥사 석분은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도를 닦던 곳으로 알려져 있고,고려시대 만들어진 듯.
무덤처럼 보이는 돌방의 입구는 네모꼴이며 내부의 바닥은 평평하고 벽면은 둥그스럼.
▲사리탑이라고도 하는 이 부도의 하단은 연꽃무늬 받침돌이다
▼법흥사
<오대산의 유래>
오대산 국립공원에는 동쪽에 만월대(滿月臺), 서쪽에 장령대(長嶺臺), 남쪽에 기린대(麒麟臺),
북쪽에
상삼대(象三臺), 중앙에 지공대(知工臺)가 있는데 이들 5개의 대를 합쳐 오대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다고 한다. 그리고 그 5대에는 각기 석가, 관음, 미타, 지장, 문수보살 등이 상주하고 있는 것으로
회자되고 있어 우리나라 최대의 불교 성지로 꼽힌다.
<월정사의 유래와 전설>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개산주는 신라의 자장율사며, 국보 48호인 팔각9층 석탑과
보물 139호인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또한 월정사 적멸보궁은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곳
이다. 월정사 말사인 상원사에는 국보 36호인 동종이 있으며, 국보 제 221호인 문수동자상이 있다.
그 문수동자상 조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는 세종의 2남으로서 문종의 아우가 되며 보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수양대군으
로 불리었다. 1425년 문종이 승하한 후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왕위가 어린 조카인 단종에게 돌아가자
1455년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등과 뜻을 모아 단종으로 하여금 선위토록 한 다음 보위를 찬탈했다.
어린 단종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는 성인인 세조가 권력을 쥐는 쪽이 밖으로는 외침으로부터 나라
를 굳건하게 수호하고 안으로는 국가를 부강케 하는 정치를 펼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조카를 내쳤다는 비난만은 면할 수 없었다. 우선 사육신이나 생육신들로 대변되는 측근 정치
가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고, 유림 중에서도 왕위 찬탈로도 모자라 사약까지 내려 조카를 죽게
한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정치적 야망 때문에 왕위를 빼앗았
지만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세조는 이래저래 편안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1457년
가을 어느 날 뒤척이다가 설핏 잠이 들었는데,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문종비 현덕왕후를 보게 되었다.
형수인 현덕왕후는 세조를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아무리 권력이 좋기로 어린 조카를 내치고도 모자라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단 말이냐. 인륜도 모르는
천하에 더러운 놈” 말을 마친 현덕왕후는 세조를 향해 침을 뱉었다.
“에이 퉤!”
세조는 소스라쳐서 깨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덕왕후가 침을 뱉은 자리에 종기가 돋더니 온몸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세조는 어의가 백방으로 손을 써도 낫지 않는 심한 피부병에 걸리고
말았다. 별별 명약도 아무 효험이 없은채 세조의 피부병은 점점 더 위중해만 갔다. 가려워서 잠을
자지 못하게 되고, 잠을 설치니 극도의 신경세약증까지 겹치게 되었다. 정사를 돌볼 수조차 없게 된
세조는 마침내 병을 고치기 위해 어가를 몰고 궁을 떠났다. 약수를 찾아 속리산에도 갔었고, 금강산
을 찾아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약수도 온천욕도 별 효험이 없었다. 금강산 다음으로 세조가 찾아간
곳은 지금의 오대산이었다.
세조는 상원사에 머물며 부처님께 귀의하여 지극 정성으로 불공을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예불을 드리기 위해 법당에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법당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절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세조대왕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신성한 법당에서 감히 화를 낼 수가
없어 조심스레 고양이를 타일렀다.
“어허, 이 무슨 일인고, 옷자락을 놓거라.”
사람에게 이르듯 고양이를 달래었으나 고양이는 좀처럼 입으로 문 옷자락을 놓아주지 않아 한참동안
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그 사이 맞은편 법당문의 주렴을 젖히고 두 사람이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이들은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비수를 꽂으려고 기다리고 있던 자객들이었다. 자객들은 고양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달아난 것이었다. 과오를 깊이 뉘우치고 지극한 정성으로 불공을 드리는
세조의 마음을 헤아려 부처님께서 고양이로 나투어 목숨을 구해준 것이리라. 세조는 이에 사례하는
뜻으로 동산리와 간평리 일대의 대지를 고양이 양식으로 쓸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헌사 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후 오대천으로 나갔던 세조는 물이 어찌나 맑은지 목욕을 하고 싶어졌다. 그는
옷을 벗고 오대천 물에 몸을 담갔다. 이때 그 옆을 지나가던 한 동자승이 가까이 닦아와서 말했다.
“소승이 등을 밀어 드릴까요?”
세조는 동자승에게 등을 돌려대며 말했다.
“어디 가서 임금의 옥체에 손을 댔었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혹 불경을 저질렀다 하여 죄를 물을까
두렵소.”
잠자코 세조의 등에 물을 끼얹으며 등의 때를 밀어준 동자승이 떠나면서 말했다.
“임금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이 등을 밀어 주더란 말은 하지 마시오.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들을까
두렵소.”
그 말을 들은 세조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어느새 동자승은 간 곳이 없었다. 그런데 몸이 이상하게
개운하여 살펴보니 온 몸에 솟아있던 종기가 씻은 듯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긋지긋하게 그를
괴롭히던 피부병이 문수보살의 가피를 받아 치료된 것이었다. 크게 감격한 세조는 화공을 불러 오대
천에서 만났던 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목각상으로 조성토록 하니 그것이 바로 현재 국보 제 221
호로 정해진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다.
백약이 무효했던 지병을 치유하게 된 세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대산을 떠나 환궁하기 전에 월정
거리에서 과거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과거에 응시하려는 선비들에게 도포 소매에 흙 한줌과 돌 하나씩을 가지고 오도록 하였는데
응시생이 만여 명에 이르러 이들이 가져온 돌로 쌓아올린 봉우리가 지금의 만과봉이 되었다고 한다.
그 위에 나무를 심은 것이 현재의 노송이며 당시 과거에 응시한 유생들의 수효가 만 명이었다고 하여
봉우리 이름을 만과봉이라 명하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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