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로에서 바라본 장산 토우총
선도산(仙桃山)은 서악(西岳)이라 하여 신라 사람들이 신성시하였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 고분군 등 수많은 고분이 있습니다. 특히 선도산 동쪽 자락은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풍수지리설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망자(亡者)의 안식처로 좋아 보입니다.
선도산의 한 자락이 남동쪽으로 꼬리를 튼 야트막한 구릉에는 경주 지역에서 가장 많은 고분이 모여 있습니다. 이 산을 장뫼(障山)라고 부르고, 이 고분군을 장산 고분군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있는 고분들은 모두 석실분인데, 이 고분들의 주인은 법흥왕 이후에 신라를 이끌었던 신라 왕족이나 귀족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곳은 신라 왕족이나 귀족들의 북망산천(北邙山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장산 고분군의 무덤들 대부분은 도굴되었으며, 특히 소형 고분의 훼손이 심합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말이 있듯이, 이곳 고분들도 봉토가 무너져 내렸고, 봉토 위에는 나무가 자랐습니다.
- 경주 장산 토우총
장산 고분군 남쪽 끝자락의 여러 고분 가운데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 유일한 고분으로 장산 토우총이 있습니다. 이 고분은 통일신라시대의 석실분으로, 봉분의 지름은 10m, 높이는 7m입니다.
신라시대의 고분은 조기(기원 전후~350년)의 토광묘 시기, 전기(350년~6세기 초)의 적석 목곽분 시기, 후기(6세기 이후)의 횡혈식 석실분으로 나눕니다. 장산 고분군은 후기의 횡혈식 석실분에 해당합니다. 현재 경주 지역에서 내부를 개방하는 석실분으로는 장산 토우총 외에도 구정동 방형분이 있습니다. 내부를 개방하는 또 하나의 고분인 천마총은 석실분이 아니라 적석 목곽분입니다.
석실분은 3명에서 많게는 10명까지 묻을 수 있으므로 자식이 죽으면 뼈를 한쪽으로 모으고 또 묻을 수 있는 경제적인 무덤입니다. 위치 또한 산지에 있기 때문에 농토를 잠식하지도 않았고, 부장품도 최소한으로 줄여 박장(薄葬)을 하였습니다.
- 장산 토우총 입구
장산 토우총 석실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철문이 굳게 잠겨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안으로 들어가서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철문 사이로 들여다보면 석실로 통하는 돌문은 볼 수 있습니다.
- 장산 토우총 돌문
석실 내로 들어가는 돌문의 모습입니다. 이 돌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신을 안치한 석실이 있습니다.
- 석실 벽면도와 평면도
비록 석실 내부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석실 벽면도와 평면도를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시체를 놓았던 시상대는 동서로 놓여 있고, 출입문은 남쪽으로 나 있습니다. 시상대는 두 구의 시신이 누울 수 있는 것과 그보다 한 단 낮게 또 한 구의 시신이 누울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동쪽에는 머리를 고정하는 돌베개인 두침(頭枕)이 있고, 서쪽에는 발을 고정하는 발 받침인 족좌(足座)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장산 토우총은 경주박물관 측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미 도굴당한 뒤라 그런지 출토된 유물은 사발 등의 토기 종류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고분에 토우총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발굴조사 당시에 널방(玄室)의 바닥 네 모서리에서 깨어진 것이지만 토우(土偶)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선도산(仙桃山)은 서악(西岳)이라 하여 신라 사람들이 신성시하였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 고분군 등 수많은 고분이 있습니다. 특히 선도산 동쪽 자락은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풍수지리설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망자(亡者)의 안식처로 좋아 보입니다.
선도산의 한 자락이 남동쪽으로 꼬리를 튼 야트막한 구릉에는 경주 지역에서 가장 많은 고분이 모여 있습니다. 이 산을 장뫼(障山)라고 부르고, 이 고분군을 장산 고분군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있는 고분들은 모두 석실분인데, 이 고분들의 주인은 법흥왕 이후에 신라를 이끌었던 신라 왕족이나 귀족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곳은 신라 왕족이나 귀족들의 북망산천(北邙山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장산 고분군의 무덤들 대부분은 도굴되었으며, 특히 소형 고분의 훼손이 심합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말이 있듯이, 이곳 고분들도 봉토가 무너져 내렸고, 봉토 위에는 나무가 자랐습니다.

장산 고분군 남쪽 끝자락의 여러 고분 가운데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 유일한 고분으로 장산 토우총이 있습니다. 이 고분은 통일신라시대의 석실분으로, 봉분의 지름은 10m, 높이는 7m입니다.
신라시대의 고분은 조기(기원 전후~350년)의 토광묘 시기, 전기(350년~6세기 초)의 적석 목곽분 시기, 후기(6세기 이후)의 횡혈식 석실분으로 나눕니다. 장산 고분군은 후기의 횡혈식 석실분에 해당합니다. 현재 경주 지역에서 내부를 개방하는 석실분으로는 장산 토우총 외에도 구정동 방형분이 있습니다. 내부를 개방하는 또 하나의 고분인 천마총은 석실분이 아니라 적석 목곽분입니다.
석실분은 3명에서 많게는 10명까지 묻을 수 있으므로 자식이 죽으면 뼈를 한쪽으로 모으고 또 묻을 수 있는 경제적인 무덤입니다. 위치 또한 산지에 있기 때문에 농토를 잠식하지도 않았고, 부장품도 최소한으로 줄여 박장(薄葬)을 하였습니다.

장산 토우총 석실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철문이 굳게 잠겨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안으로 들어가서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철문 사이로 들여다보면 석실로 통하는 돌문은 볼 수 있습니다.

석실 내로 들어가는 돌문의 모습입니다. 이 돌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신을 안치한 석실이 있습니다.

비록 석실 내부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석실 벽면도와 평면도를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시체를 놓았던 시상대는 동서로 놓여 있고, 출입문은 남쪽으로 나 있습니다. 시상대는 두 구의 시신이 누울 수 있는 것과 그보다 한 단 낮게 또 한 구의 시신이 누울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동쪽에는 머리를 고정하는 돌베개인 두침(頭枕)이 있고, 서쪽에는 발을 고정하는 발 받침인 족좌(足座)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장산 토우총은 경주박물관 측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미 도굴당한 뒤라 그런지 출토된 유물은 사발 등의 토기 종류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고분에 토우총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발굴조사 당시에 널방(玄室)의 바닥 네 모서리에서 깨어진 것이지만 토우(土偶)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